김원섭의 아침을 여는 세상

[데일리메일]-김원섭 아침여는세상-【여순사건 70년】“태백산맥아,이제 너는 말할수 있다!➬특별법 제정통해 명예회복

[데일리메일=편집인 김원섭]“194810,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군당 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 속으로 퇴각한다.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무당딸 소화를 이용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는데......,”

1983현대문학9월호에 여순사건을 토대로 시작, 게재되기 시작한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벌써 여순사건발생 70년을 맞는다. 여순사건은 반란과 항쟁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동안 여순반란사건,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항쟁, 여순군란, 여수병란 등으로 불리며 제주4·3항쟁과 함께 민족사의 비극적 사건으로 현대사에 기록됐다. 하지만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면서 사건의 성격이 정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봉기의 주체가 군인의 신분을 지녔다는 이유로 이들의 행위를 반란으로 규정하려는 시각은 현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다.

194843일 새벽 2, 남로당 제주도당 소속 당원 350여 명이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비극적인 4.3 사태가 시작되었다. 사실 한 해 전 3.1절 기념행사에서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이가 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도민 일부가 경찰서에 가서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경찰측의 발포로 6명이 사망을 했다. 이 때 곪은 양측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10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 증파를 결정한다. 이때 제주도 파병을 명령 받은 여수 14연대가 동족 학살을 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고 1019일에 봉기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순사건의 발발에는 북한의 지령도 남로당의 명령도 없었다. 그 지역에는 이미 일제때부터 소규모 독서모임들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그 구성원들의 영향이 컸다. 봉기 초기에는 하사관이 중심이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봉기는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역사에는 좌익에 의한 학살극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 여순사건을 연구해 온 김득중씨는 대한민국 성립 초기 국가 형성과정에서 노골적인 국가 폭력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주체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임무를 맡은 군대와 경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여순사건에서 당시 '반란군' 활동을 하던 박정희의 배신으로 군대 내 좌익 세력이 토벌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는 몇 가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박정희는 사건 발발 바로 다음 날 도착한 토벌군 정보국장 김점곤의 안내를 맡았었고 여순 사건이 끝난 1111일에야 체포되었다. 그의 남로당 경력이 문제였던 것이지 실질적으로 여순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체포된 뒤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가지고 있던 군내 좌익 명단을 토벌군에 넘겨 주었고 이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고 여순사건 진압 당시 보여주었던 박정희의 능력을 높이 산 군지도부와 미군에 의해 구제되어 출감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2년 전인 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경상북도 선산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06일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상희는 이미 경북지역의 명망 있는 좌파 지도자였는데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 박정희가 군대 내에서 대위의 계급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박정희는 투철한 이념에 따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아니라 박상희의 권고로 당시 대세였던 좌익에 줄을 섰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던 중 형이 사망하고 대구 항쟁이 진압되자 자발적으로 좌익의 정보를 빼내 '세작' 을 준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4.3 사건이 발생했고 진압과정에서 정부군의 기세가 등등하자 그는 조금씩 전향의 기회를 엿보았던 것같다.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반란군에 참여했을 법한 박정희는 천연덕스럽게 정부 편에 섰다가 남로당 명단을 넘긴다. 그가 이전부터 백선엽과 같은 친일 장교들에게 지속적인 정보를 제공해왔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다시 군대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남로당 소속 군인 명단을 넘겨 준 공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감형의 사유는 될지 몰라도 군대 복귀는 어려운 일이었는데도 백선엽의 도움으로 박정희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가 마침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백선엽의 도움으로 군대에 복귀했다고 말하지만 백선엽 말처럼 박정희가 도와 달라고 찾아와서 군대 복귀를 도와 주었다라는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알려진 두 사람의 일본군 장교로서의 친일 행각보다 서로만이 아는 더 깊고 추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일본이 패망하자 며칠을 걸어 독립군을 찾아갔다는 그의 일화처럼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정치적 변혁기에 양지의 냄새를 맡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형이 참여했던 대구 항쟁과 제주의 4.3, 그리고 여수 순천에서 일어나던 비극의 시간에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양지를 지향하는 것 말고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동족을 학살할 수 없다며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 여수 14연대에 한 때나마 관여했다가 처벌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배신한 사람, 즉 어느 정도 정상이 참작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심정적으로도 14연대의 마음과 조금의 연관성도 없었고 오직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단이 어떻게 자신을 살릴 수 있을까만 궁리하던 인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반공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진압이 완료된 그해 12, 국가보안법을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에는 군부의 숙군이 본격화되었다. 현역군인의 약 5%가 갈려나갔는데, 억울하게 붙들려간 사람도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나중에 석방되어 고위장성을 역임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무고하게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받아 장애를 입은 사람도 숱하다. 신원조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엉망이던 군부를 다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사건이 북한의 지령이나 남로당 지도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얘기도 있으나, 남로당에서도 북한에서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남로당은 공중파 라디오 뉴스를 듣고 비로소 사건 발생을 알았다고 할 정도. 우발적으로, 게다가 사병 위주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후의 어떠한 계획도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군 내부에 세포조직을 키워 세력화하려고 했던 남로당은 이 사건 이후로 군 내부의 좌익계열들이 모조리 색출되어 군 내부에서 남로당의 기반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타격이 매우 컸다.

특히 김구선생이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선생 암살관련 미 존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여순사건이 제주4·3항쟁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데도 여전히 왜곡된 채 방치되고 있다. 이와관련, '여순10·19특별법 제정을 위한 범국민연대'18"여순사건 70주년이 되는 19일부터 한달 동안 '청와대 국민청원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전남 동부지역 70여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범국민연대는 이날 순천역 앞에서 국민청원 선포식을 갖고 "여순사건의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의 출발은 '여순 10·19 특별법' 제정"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여순사건은 흔히들 '여순반란사건'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그렇게 부르기를 누군가로부터 강요받았고, '아니다'라고 말하면 '빨갱이'가 되기 때문에 '반란'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여순사건은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 명령을 '동포 학살'로 받아들인 여수 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해 일어난 것"이라며 "이들은 국민의 군대로서 국민을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범국민연대는 "제주는 4·3사건 관련 특별법이 제정돼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를 방문해 국가의 잘못된 폭력에 사과까지 했다""하지만 국가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순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진상규명, 희생자 피해보상, 부당한 국가 폭력 등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더이상 후손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물려줄 수는 없다""국회가 외면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청와대에 20만명의 청원운동을 전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이 나고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역사적 고증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뿐더러 여순사건에 대한 언급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공포 분위기가 지금까지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문학적으로 승화되지 않으니 일반인들에도 '친숙하게' 알려지지 못했다.

역사 적폐청산의 출발점은 특별법 제정이다. ‘여순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올바르게 성격규정하며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배상을 실행하는 것이다.